생각에도 높이가 있다
같은 주제를 다뤄도 코드 레벨과 철학 레벨은 완전히 다른 높이다. Z축(추상도)이라는 개념으로 사고의 고도를 분석해본다.
같은 대화인데 왜 따로 노나
기획 미팅을 해본 사람은 안다. 한 시간 동안 회의했는데 결론이 안 나는 경험. 다들 열심히 이야기했는데 끝나고 나면 "우리 뭐 결정했지?" 싶은 그 느낌.
이게 왜 발생하는지 한번 뜯어보면, 대부분 이런 패턴이다.
뭐가 문제일까? A는 Ground 레벨(버튼 위치, 색상)에서 이야기하고 있고, B와 C는 Strategic 레벨(이 기능이 필요한가)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같은 단어("온보딩")를 쓰고 있지만 고도가 다르다.
리스트나 마인드맵에 이 대화를 기록하면? 전부 "온보딩" 아래에 flat하게 나열된다. 고도 차이가 사라진다.
Z축이라는 아이디어
지난 글에서 생각의 3차원을 소개했다. X축(시간), Y축(분기), Z축(추상도). 오늘은 Z축만 파본다.
Z축은 생각의 높이다. 같은 토픽이라도 얼마나 구체적인지, 얼마나 추상적인지에 따라 높이가 달라진다. 이걸 네 개의 밴드로 나눈다.
아직 안 봄
각 밴드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이 있는 건 아니다. 스펙트럼이다. 중요한 건, 대부분의 대화가 특정 밴드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
고도 잠금: 가장 흔한 사고 함정
나는 이걸 Altitude Lock이라고 부른다. 같은 높이에서 5턴 이상 맴도는 현상.
대부분 자기가 갇혀 있다는 걸 모른다.
개발자는 Implementation Gravity에 특히 취약하다. 나도 그렇다. 문제를 보면 바로 "이거 어떻게 만들지?"로 간다. DB 스키마를 그리기 시작한다. 근데 그 기능이 정말 필요한 건지, 사용자가 실제로 원하는 게 이건지는 안 물어본다.
반대로 경영진 미팅에서는 Abstraction Orbit이 흔하다. "우리의 비전은...", "장기적 전략은..." — 좋은 이야기지만 다음 주에 뭘 해야 하는지가 안 나온다.
좋은 사고는 왕복 운동이다
핵심은 이거다. 어떤 고도가 좋고 나쁜 게 아니다. Ground에서 코드를 짜는 것도, Abstract에서 본질을 묻는 것도 둘 다 필요하다. 문제는 한 곳에 갇히는 것.
좋은 기획자의 머릿속을 추적하면 이런 패턴이 나온다:
위아래로 자유롭게 오간다. 구체적 데이터를 보다가 "잠깐, 이게 큰 그림에서 맞나?" 하고 올라가고, 추상적 방향을 잡으면 "그러면 다음 주에 구체적으로 뭘 하지?" 하고 내려온다.
이 왕복 운동이 막히면 사고가 정체된다. 근데 기존 노트 도구들은 이 고도 변화를 추적하지 않는다. 모든 생각이 같은 평면에 있으니까.
고도를 어떻게 판단할까
생각의 높이를 판단하는 건 사실 직관적이다. 몇 가지 시그널이 있다.
도구명, 파일명, 컬러 코드, 날짜, 금액. "Figma에서 8px 그리드로"
A vs B, 프로세스 설계, 방법론 논의. "스프린트 1에 넣을지 2에 넣을지"
우선순위, 기회비용, 이해관계자 관점. "이걸 먼저 하면 저걸 못 하는데"
멘탈 모델, 제1원리, 존재 이유. "우리가 정말 풀어야 할 문제는"
재미있는 건, 같은 단어가 다른 고도에서 쓰일 수 있다는 것.
"온보딩"이라는 단어 하나를 봐도:
- Ground: "온보딩 3번째 화면의 CTA 버튼 텍스트를 뭘로 할까"
- Tactical: "온보딩 플로우를 3단계에서 2단계로 줄이는 게 나을까"
- Strategic: "온보딩 완료율이 리텐션에 실제로 영향을 주는가"
- Abstract: "사용자가 제품을 처음 만나는 경험의 본질이 뭔가"
단어는 같은데 고도가 완전히 다르다. 이걸 구분하지 않으면 회의에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같은 이야기를 한다고 착각하게 된다.
탐색의 빈 공간
Z축이 추적 가능해지면 한 가지 더 보이는 게 있다. 빈 공간.
왜 이 앱이 세상에 필요한가
아직 전혀 안 봄
언급만 되고 넘어감
인터뷰 3건 완료
논의한 적 없음
Strategic 밴드에 경쟁 분석과 수익 모델이 점선(gap)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팀은 비전(Abstract)과 실행(Tactical/Ground)은 열심히 했는데, 정작 "이게 시장에서 먹히는가"(Strategic)는 건너뛴 거다.
이런 빈 공간은 2D 노트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마인드맵에 "경쟁 분석" 노드가 없다고 해서 그게 문제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Z축 위에 올려놓으면 — Strategic 밴드가 텅 비어 있으면 — 바로 눈에 들어온다.
다음: AI를 부를 필요가 있을까
여기까지 읽으면 "그래서 이걸 어떻게 도구로 만드는데?" 궁금할 거다. Z축 값을 자동으로 계산하려면 AI가 필요할까? 텍스트의 추상도를 측정하는 NLP 모델이 있어야 할까?
짧은 대답: 꼭 그렇지는 않다.
다음 글 예고 — "사고 도구에 AI가 필요한가"에서 이 질문을 본격적으로 파본다. Dimension이 AI에 기대지 않는 이유, 그리고 옵시디언이나 노션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프로덕트를 지향하는 이유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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